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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단편 (Novella)

히메지성, 만남

by 노블리스트 2019. 10. 7.

고베라는 단어가 특별히 느껴지지 않았다. 먼 이국땅에서 오래 지내서 한국, 일본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 별다른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일본의 고베라고 하면 생각나는 거라고는 그 기름기 듬뿍한 고베규의 현란한 마블링 (marbling)인데 소고기에 흥미를 잃은 지 한참 지난 터라 뭐, 정말 흥미가 없다.

 

란 인간은 이미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이 살아온 지가 한참 지난 초식남에 가까운 사람이다. 워낙에 쳇바퀴같은 생활을 즐겨왔기 때문에 사람관계가 나이가 왠만큼 든 지금도 너무나도 서툴다. 어렸던 중학생 시절에 미국으로 유학, 아니 도피유학을 온 이후로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공부에 매진해서 나름대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까지 안착하였지만 일상생활의 단조로움은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에는 아주 큰 걸림돌이었다.

 

내가 지금 다니는 직장은 정말로 프리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모든 회사가 그런건 아니지만, 창의력을 요구하는 직업의 특징 때문에 회사에서도 정말 많은 것을 통제하지 않는 문화를 장려한다. 휴가도 거의 마음 대로 쓸 수 있고,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 업무적인 문제로 일반적으로 일하는 시간에 연락이 되고 분기마다 그 때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경과만 보여주면 되는 정말로 프리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그런 이유였는지 몰라도 어느 날은 회사 옆 스타벅스에서 일 반, 노는거 반으로 있으면서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보게된 일본의 고성의 모습이 갑자기 꽂혀서, 즉흥적으로 휴가를 계획하게 되었다. 유럽의 옛날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성의 모습도 멋있지만 오히려 덜 익숙한 일본의 고성의 모습에 너무나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Himeji Castle Himeji Japan 2019

 

그래서, ‘고베라는 단어와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일본 만화책에서 몇 번 읽었던 기억이 나던 오사카성을 찾아보다가 오사카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히메지성의 사진들이 굉장히 강렬하게 인상에 남게 되었다. 거의 모든 벽면이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는 백로를 닮은 히메지성은 직접 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너무나 궁금해졌다. 오사카가 워낙 유명한 관광지여서 오사카를 갔다가 히메지성으로 갔다는 글들이 너무 많았는데 히메지성을 보기 위해서는 오히려 오사카보다는 고베로 가야 하는 거였다.

 

시애틀 공항에서 아침 이른 시간에 비행기를 타는 경험은 이제 익숙하다. 서둘려 예약한 비행기여서 아침 일찍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가서 도쿄를 거쳐서 고베 공항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비행도 여행의 일부라 생각해서 평소에 좀 돌아가거나 경유가 좀 많아도 개의치 않기 때문에 이런 일정도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787 Dreamliners Boeing Field Seattle Washington 2011


저녁 시간이 좀 지난 즈음에 고베 공항에 내려 모노레일을 타고 고베의 중심가인 산노미야 지역으로 이동했다. 히메지성으로 가는 기차를 산노미야 역에서 탈 예정이어서 산노미야 기차역과 가까운 호텔로 체크인했다. 밤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꽤 큰 도시인 고베의 중심가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은 거리가 익숙한 풍경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혼자 가벼이 여행 가방을 들고 있는 나의 모습이 조금은 한심했다. 꽤 멀리 왔고 잠도 잘 안 오고 해서 아침 일찍 히메지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옷을 챙겨입고 나왔다.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 그리고 잔비가 내리고 있는 바깥 모습에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산노미야 기차역은 평일 아침이라 많이 붐볐다. 히메지로 가는 기차표를 끊고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이 많이 보였다. 줄서는 문화에 익숙한 일본이라 긴 줄의 끝에 서서 기차를 기다렸다. 출퇴근, 통학 하는 기차라서 교복입은 학생들, 제복같은 반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이 무척 많아서 한참을 서서 가야했다. 다들 우산을 가지고 기차를 타서 기차안도 물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한시간이 안 걸렸던 기차여행을 마치고 히메지역에 도착, 많은 사람들에 끼여 역 밖으로 나왔다. 좀 멀리가면 비가 그칠 줄 알았는데 여기는 비가 더 온다. 비가 온다는 것은 다니기에는 불편한데 장대비가 아니면 그만큼 맑디 맑은 시야를 자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오는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 멀리서도 잘 보이는 히메지성으로 향했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아침부터 해결하기로 하고 이 시간에 열려있는 베이커리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Himeji Castle Himeji Japan 2019

 

빵 한 조각, 커피 한 잔을 시키고 기다리면서 테이블에서 앉아있었다. 비를 조금 맞은 모습의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주위를 좀 둘러보더니 가지고 있던 큰 배낭을 내려놓고 카운터에서 뭔가를 시키는 듯 했다. 난 혼자이고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관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조금 거리가 있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혼자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 들고 열심히 뭔가를 적어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먼저 여행을 하다왔는지 약간은 피곤해 보였고 긴 일정의 여행이었는지 큼지막한 배낭까지 매고 있어서 정말 궁금했다.

 

관심이 있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지만 오랜 기간 사람들을 멀리해온 탓인지 친근감있게 느껴지던 모습은 왠지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시켰던 음식이 나오고 잠시 음식에 열중해 있을 때 출입구 쪽으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나서 봤더니 그 큰 배낭의 그녀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히메지성안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자마자 역시 입장료를 낸 걸 후회하지 않게 해주는 훌륭한 뷰가 이어졌다. 하지만 난 아침 일찍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계속 아른해서 정신이 좀 없었다. 갑자기 먼저 시야에서 사라져서 무척 아쉬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Himeji Castle Himeji Japan 2019

 

히메지성의 천수각에 도착해서 우산과 신발을 비닐 봉지에 넣고서 걸어들어갔다. 아주 옛날, 그래봐야 몇 백년 정도 전이겠지만, 이렇게 커다란 집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 침략해올지 모르는 적들을 걱정하며 살던 모습이 그려졌다. 높은 곳에 있는 이 집은 꼭대기에 올라가야 좋은 뷰를 볼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아주 불편했던 계단을 빨리 올라가버렸다.

 

다락방같던 꼭대기층은 예상대로 많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나있는 창문을 통해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이때쯤이었다. 체구가 작은 동양인 여자애가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그 친구였다. 아마도 그 큰 배낭을 어딘가에 맡겨놓고 오느라 먼저 사라진 그녀는 이제야 되어서 이 히메지성의 천수각에 도착했나보다 했다.


Himeji Castle Himeji Japan 2019

 

외로움이 짙어서였나, 아니면 나이가 이미 왠만큼 있어서였나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그 친구에게 다가갔다. 아마 그녀도 나를 두번째 목격해서인지 경계심보다 호기심으로 다가가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나보다. ‘Hello.’

 

혹시…?’ 영어로 헬로우 한 후에 갑자기 한국어로 전환을 시도한 것은 그것이 가장 빨리 한국인인지 확인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 한국분이셨어요?’라는 반응이 곧장 왔다. 생김새와는 다른 약간은 허스키한 음성의 그녀는 정말 경계심보다 반가움으로 나의 뜻밖의 접근을 받아들였다.

 

금세 친해지게 되었다. 비가 많이 오던 날이라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히메지성을 찾은 사람도 많이 없었을 뿐 아니라, 서로 혼자서 여행을 온 경우라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자 경계심이고 뭐고 생각할 여를도 없었던 것이다.

 

나보다는 꽤나 나이 차이가 나는 21살이라고 자신을 밝힌 소연이는 한달간 일본 각지를 돌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 코스로 이 곳에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최소연. 나랑은 세대차이가 조금은 나는 이름이다.그녀는 재수를 한 뒤 서울의 한 여대에 진학하게 된 후 첫학기가 지나고 지쳐있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달간의 일본 배낭 여행을 계획한 거라고 했다.

 

나의 사정, 나의 이 즉흥적이기 그지 없는 여행의 전후과정을 듣고 난 그녀는 자신의 힘들었던 입시생활의 힘들었던 시기와 오버랩이 많이 되었다고 한다. 이번의 배낭 여행도 정말 어렸을 적부터 해보고 싶었던 유럽 배낭 여행을 가기 전 가까운 일본을 통해 실습 비슷한 것을 해보는 것이라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를 말하는데 난 그냥 웃고 말았다. 나도 저 나이 때는 정말 모든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정당화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히메지성의 천수각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 히메지시의 모습을 뒤로 하고 힘겹게 올라왔던 계단을 내려와 다시 성안을 걸어보기로 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을 때는 각자 혼자여서 설렘반, 외로움반이었다면 짧은 시간일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통하는 이성과 같이 빗 속에서 이 아름다운 하얀색 투성이의 성 내를 걷는 것은 마음의 안위, 그리고 즐거움 같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Himeji Castle Himeji Japan 2019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지만 사진으로 먼저 보고 왔던 히메지성은 정말 아름다웠으며 여행을 더 생각나게 하는 마음이 통하는 동반자와의 만남 역시 행복한 일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소연이를 보고 있으니 긴 여행으로 지친 모습이었지만 긴 혼자하던 여행에서 오는 만족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화장기가 많이 없었던 얼굴이어서 더 자연스런 모습에서 친근감이 더 느껴졌다.

 

한 세시간 정도를 보냈던 것 같다. 성 안이 꽤나 넓어서 그리고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어서 천천히 우산을 쓰고 다니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 같다. 소연이는 기차역에 맡겨두었던 배낭을 찾으러 가야 한다고 해서 같이 따라갔다. 소연이도 나도 고베로 돌아가야 해서 어느 정도 남은 일정도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베에 돌아가서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하고 아까 탔던 그 기차를 같이 타고 가자고 했는데 소연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패스를 가지고 신고베에서 와서 그쪽으로 가는 기차편 밖에 모른다고 했다.

 

신고베역과 내가 가야하는 산노미야역은 거리가 좀 있기 때문에 헤어지기가 왠지 싫었던 나는 소연이를 잘 설득해보기로 했다.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여 같이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다시 우리는 고베에 도착. 점심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호스텔까지 소연이는 바래다 주고 난 다시 내가 묵고 있던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소연이에게 꼭 한번 내가 사는 시애틀로 오라고 몇 번의 당부를 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던 소연이의 그 날의 모습은 일년이 안 되어서 시애틀이 아닌 로스엔젤레스에서 볼 거라고는 그 때는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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